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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China

중국 시안 여행 가이드 - 병마용에서 화청지까지

 

서안(시안, 西安)

 

 

 

섬서성의 성도로 역사 문화 행정의 중심지. 서안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에서 비롯되며, 그 뒤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수도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본래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1943년에 시(市)가 설치되었다. 가장 번영했던 당대에는 인구 10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로 장안도 쇠퇴하였다. 현재의 시역(市域)은 명(明)나라 때 구축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와 교외로 되어 있으며, 명청(明淸) 시대에 서안부를 설치한 바 있으나 중화민국 때에 그것을 폐지하고 섬서성에 직속시켰다. 또한 서안은 역사적 도시로 사적이 풍부해,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화청지, 병마용 등 다양한 유적지를 지니고 있다. 또 성내에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이 진열되어 있고, 북쪽의 비림(碑林)에는 당송(唐宋) 시대의 비가 많이 보존되어 있다.

 

 

 

 

서안성벽(시안구청치앙, 西安古城墙)

 

 

 

 

서안성벽은 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완정한 고성중의 하나다.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가 12m, 폭이 15m로 높고 두터운 고성벽이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3년에서 11년까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그 역사가 이미 600년에 이른다. 고대 전쟁사를 보면, 이 성벽은 유일한 출입통로로서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방어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성벽은 동서남북의 4개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는 넓고 깊은 호성하(護城河)가 흐르고 정문에서 시작되는 정로를 가로지르는 조교(弔橋)가 놓여있다.

1982년 7월에는 섬서성정부의 주창아래 서안시민 몇 십만 명이 힘을 합쳐 독특한 풍격의 환성공원(環城公圓)을 조성했는데, 성 정상부분에는 조그마한 화원을 여러개 만들어 놓았다. 서안성벽은 단지 역사적인 건축물의 의미를 넘어서 공원과 성, 길, 물로 조성됨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서안성벽은 입장료를 받고 오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넓은 성을 둘러보게 하기 위해 모형전동차도 운행한다. 더운 여름 저녁에는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는 서안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섬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서안시에 있는 섬서역사박물관은 서안을 중심으로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유물을 집대성한 장소이다. 1987년 7월 1일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991년 6월 20일에 대외에 개방하였다. 박물관 내부는 총 3개의 전시관이 시대별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1층)에서 선사시대이후 및 진나라 역사를 전시하며, 제2전시실(2층)에서 양한 위진남북조 역사, 제3전시실(2층)에서 수, 당, 송, 명, 청대의 역사를 전시한다.

 

섬서역사 박물관은 현대식 설비를 갖춘 최초의 중국 국가급 역사박물관으로 총 36만점을 전시하고 있다. 현대적 국가급박물관으로 중국에서 가장 일찍 만들어진 것이다. 박물관은 당나라 시대 건축풍격을 모방하였다. 그래서 고색창연한 분위기와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부지면적은 7만m², 건축면적은 6만m²이며, 전시관면적은 1.1만m²이다. 기본 전시 내용은 “섬서 고대역사 전시”와 섬서에서 출토된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 역대 문물 중 뛰어난 것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품은 3000여 점에 달한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청동기, 진·한 시기의 도자기, 도룡, 당나라의 당삼채와 금은옥기, 다채로운 공예품들이다.  특히, 주(周)날 때부터 당(唐)날 때까지의 역사유물이 볼만하다. 섬서 역사박물관은 내에는 문물보호 센터, 도서관, 다용도 학술보고실 등이 갖춰져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전시품과 자료 관리를 하고 있으며, 자동 조절 에어컨과 인공 조명시스템, 6개국어 동시통역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청진사(淸眞寺)

 

 

 

서안 고루(鼓樓)의 서북쪽 코너 화각항(化覺巷) 내에 위치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되었으며, 규모가 크고 현재까지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이슬람사원이다. 중국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면서도 이슬람교 사원만이 지니는 특색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원년(742년)에 지어졌으며, 송, 원, 명, 청대로 이어지면서 점차 규모가 커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전체 면적은 12㎢이며, 건축 면적은 4㎢이고, 동서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장방형의 형태로, 예배당은 천명이 동시에 절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서안의 7만여 이슬람신도들의 종교생활 장소로서 최근 20년간 세계 80여개 국가의 여행객들과 50여만 명의 이슬람 신도들이 방문. 현재도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원의 정원까지는 여행객들이 들어갈 수 있으나 예배당은 이슬람교도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서안 고루(구로우, 鼓楼)

 

 

 

서안 고루는 서안시내 중심에 위치한 종루에서 45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종루보다 4년 먼저 건축된 명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북경의 자금성, 명 13릉 다음으로 당시 건축기술과 미학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종루가 종을 쳐 시간을 알리는 누각이라면 고루는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곳이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종을 치고, 밤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약 10분 정도 진행되는 공연이 매일 열려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고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고루는 1380년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최근에 다시 보수하면서 나무 대신 콘크리트로 기둥을 다시 세웠고, 없어진 북도 새로 만들어 달았다. 새로 제작됐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없다.

 

서안 고루 뒤쪽에는 회족(回族)들이 몰려사는 회민가가 있다. 회족은 이슬람교를 가지고 있는 중국 소수민족이다. 이들은 중국인이 즐겨먹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양고기를 즐겨먹는다. 그래서 대표적인 음식인 '양로우 파오모'나 회족 특유의 '양꼬치'를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서안에서 양고기 음식을 맛보는 것도 꼭 경험해봐야 할 일이다.

 

 

 

 

팔로군서안판사처기념관(빠루쥔 반스추 지니엔관, 八路军办事处纪念馆)

 

 

팔로군 서안 판사처 기념관은 해방이후에 건설된 전쟁기념관으로 항일전쟁 당시의 혁명근거지이다. 이곳에는 공산당 설립 이전부터 항일전쟁 전후까지의 현대사가 연루된 역사적인 곳이다. 서안 기차역 주변의 혁명공원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엔 외관상으로는 독일 치과의사의 병원인 척 하면서 실제로는 연안(延安)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곳이었다. 주은래, 주덕, 등소평 등 공산당 간부들이 묶었던 곳이기도 하며,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작품의 저자인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스노(Edgar Snow)도 이곳에서 묵었었다.

 

1935년 10월, 모택동이 이만오천리장정(兩萬五千里長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연안(延安)에 입성하면서 연안은 중국 공산당 혁명의 총사령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당의 장개석도 서안을 섬서성과 감수성 침공의 주요기지로서 사용하게 된다. 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 전쟁정책의 영향아래 전국 항일운동이 고조되면서 국민당의 동북군과 서북군이 발병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나고 이어 모택동과 장개석의 제 2차 국공합작이 진행되면서 농공민들로 이루어진 홍군이 집합한 ‘홍군연락처(紅軍聯絡處)’가 집합된다. 이 기관은 이후 1년 뒤에 이름을 ‘팔로군주서안반사처’로 바꿨는데, 이곳은 공산당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현재 이곳은 그당시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으로서 항일전쟁 당시의 비참한 중국의 상황을 담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일본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한양릉(漢陽陵)

 

 

 

정식명칭은 한양릉 박물관으로 묘지답게 지하로 되어 있으며 서안 서북쪽 건현(乾縣)에 있다. 한(漢)나라 제4대 황제 경제(景帝)와 황후 동영의 합장릉이 있다. 한양릉 박물관은 관람객이 유리로 된 통로를 따라 발굴 당시 그대로 보존된 부장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무사, 시녀, 환관, 각종 동물 등 다양한 도용이 그 시대의 특색 있는 매장풍습을 보여준다.

 

진시황릉의 토용과 다른 점은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일 대 일 비율로 만들어져 토용 하나의 크기가 180Cm가 되지만 한경제의 한양릉의 토용의 크기는 60Cm정도이며, 재미있는 것은 한양릉의 토용들은 모두가 모두 자상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나체(裸體) 토용이면서 팔이 없다는 것이다. 본래는 토용들에 실크로 만든 옷을 입혔으나 그동안 삭아 없어졌고 나무로 만든 팔은 썩어 사라졌으며 토용들의 남녀 구분이 확실한 것이 특징이다.

 

 

 

 

무릉(茂陵)

 

 

 

무릉은 서안시 서북쪽에서 40km, 흥평시 동쪽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무릉은 한(漢) 무제(武帝) 유철(劉徹)의 묘로 아직 발굴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이름이 유철(BC 156 ~ BC 87)이며, 한(漢) 경제(景帝)의 셋째 아들로 경제가 죽은 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54년간 재위하다가 71세에 순행에 올랐다가 도중에 병사하였다. 한 무제는 사상적으로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儒家)를 제외한 기타 학설의 전파를 금지하고, 유학을 봉건사회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중앙집권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부터 유학은 다시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 흉노를 정벌하고 흉노의 위협을 사전에 없앴다. 그리하여 광대한 황하 유역의 경제 문화적 발전을 확보하였다. 또 남방에서 할거하던 남월(南越: 고대 남방 월인<越人>의 한 갈래) 정권을 제거하고 지금의 광동 광서 지구를 통일하였으며, 아울러 지금의 운남성과 귀주성 등에 군(郡)을 설치하여 한족과 각 소수민족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장건(張騫)을 두 차례나 서역으로 파견하여 대월지(大月氏: 지금의 신강성 서부), 오손(烏孫: 지금의 신강성 이려하(伊犁河) 일대), 안식(安息: 지금의 이란고원) 등지로 가서 서역 민족과 한족의 경제 문화 교류를 강화하고, 장안에서 유럽 로마제국에 이르는 ‘비단길(絲綢之路)’을 개척하였다.

 

무릉 근처는 황제들의 묘가 열 한 개나 있으나, 무릉이 그중 가장 크다. 무릉은 묘라기보다는 산과 같은 모습으로 흥평현(興平縣) 북동쪽의 남위진(南位鎮)에 있다. 서한(西漢)의 왕릉은 당(唐)나라 때의 것과 달리, 대개 평지에 높고 거대하게 쌓아 놓은 봉토(封土)무덤이다. 아래쪽 길이는 240미터, 높이 46.5미터로, 외형은 사각형이고 꼭대기 부분은 평평하다. 무제 즉위 다음해부터 건조하여 53년이나 걸려서 완성시켰다. 봉토 바로 옆에 곽거병(霍去病)의 배장묘가 있으며, 묘 앞에는 십 여 개의 대형 돌 조각상이 있다.

 

 

 

 

건릉(乾陵)

 

 

 

 

 

 

서안시에 있는 건릉은 중국 2천 여년 봉건역사 중 유일하게 두개 제왕이 합장한 능묘이다. 측천황후로도 불리우는 무측천(武則天)의 무자비(無字碑: 글자 없는 비)가 있는 건능(乾陵)은 당(唐) 18능 중 가장 완전하게 보전된 황궁의 능원이다.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와 중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무측천이 함께 묻혀 있는 건능은 중국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합장된 무덤이다. 무측천이 자신을 위해 세운 “무자비”가 지금까지 건능을 지키고 있다. 건능은 당조의 18개 제왕무덤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능이다. 건능은 해발 1,049m의 산을 능으로 만들었는데 산세가 원추형이고 규모가 방대하다.

 

남쪽을 바라보는 능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지 또한 어마어마하다. 외성의 유적은 이미 없어졌지만 내성은 그대로 남아 있어 면적 2.4평방킬로미터, 석각이 있는 성문 4개가 여전하다. 능의 앞쪽에는 길이 575m, 너비 11m되는 3,200개의 섬서(陝西) 검은 옥으로 무어만든 526개의 계단과 18개의 건조대가 있다. 건능의 지상 건물은 대부분 석각인데 도합 114점이다. 이런 석각은 모두 커다란 바위로 된 조각물이다. 건능의 동남쪽에는 17개의 순장능이 있다. 영태(永泰)공주, 장회(章懷)세자 등의 능이 발굴되어 원상 복귀되었고 영태공주의 능원에 건능박물관을 세웠다.

 

 

 

 

화산(후아산, 華山)

 

  

 

 

 

중국 5대 명산 중의 하나로서 서안시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최초로 중점 풍경명승지로 지정됐다. 동봉조양, 서봉연화, 중봉옥녀, 남봉낙안, 복봉운대 등의 다섯 봉우리로 이뤄진 화산은 각각의 경치가 특색 있고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해 이미 수많은 외국여행객들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연꽃과 같아 ‘화산’이라고 부른다. 화강암 단괴로 형성된 산으로, 최고봉의 높이는 해발 1,997m이다. 험준하고 기이한 봉우리와 우뚝 솟은 절벽이 위하(渭河) 평원을 내려다보며, 깎아지른 듯한 천길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관광 명승지로 알려졌다.

 

화산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으로, 물이 암석지대로 몰려들어 하늘로 치솟은 형태의 골짜기를 이룬다. 골짜기에 쌓여 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인 유명한 어석(魚石)은 청(淸)나라 강희연간(康熙年間:1662~1722)에 폭발한 흙·모래·돌이 섞여 일어난 홍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화산 북쪽 언덕의 큰 단층은 최근까지도 활동을 계속했다.

 

 

 

 

법문사(파원쓰, 法門寺)

 

 

 

 

 

 

 

 

 

 

 

섬서에는 세계에서 가장 휘황찬란한 고적들이 밀집돼 있다. 중화문화의 뿌리가 고스란히 간직된 법문사는 목전 세계에서 유일한 불교의 시조이신 석가모니의 지골(사리)를 간직하고 있는 사원이다. 중국의 사리신앙 도량은 단연 섬서성에 위치한 법문사다.

법문사는 섬서성 부풍현(扶風縣) 법문진(法門鎭)에 위치하고 있다. 서안에서 서쪽으로 1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법문사에는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佛指)가 봉안돼 있다. 그래서 중국 정부차원에서도 법문사를 국가 1급 보물(국보)에 해당하는 사찰로 지정해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다.

 

서기 300년 후한시대에 건립된 사찰로 알려진 법문사는 당(唐)나라 때는 황실에서 직접 사찰을 관리했다. 그래서 이 사찰에 주석하는 스님이 5000여 명이 넘었을 정도로 거대했다. 신라의 학자였던 고은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머물면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를 쓴 장소로도 유명하다.

 

 

 

 

진시황의 황궁 아방궁유적지(아팡궁 이즈, 阿房宫遗址)

 

 

서안과 중국, 중국역사를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진시황(秦始皇)의 황궁이다. 지금은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흔적만이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규모를 알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동서 2,500m와 남북 1,000m의 크기로 앞의 전(殿)과 뒤의 궁(宮),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의 유적지는 동서 1,300m와 남북 500m의 60만 평방미터의 면적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京城-북경), 함양(咸陽-서안)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 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부상(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가득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西周)의 풍고근처에 아방궁의 전전(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방(阿房)’이라는 것은 ‘근방(近旁)’,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 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병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곳은 1961년에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비석의 숲 비림(비린, 碑林)

 

 

 

비석의 숲이다. 서안의 삼학가(三學街)에 자리 잡고 있는 섬서성 비림박물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북송 철종(哲宗)년간(1090년)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碑亭)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 수 있으며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볼만한 곳이다.

 

 

 

 

소안탑(샤오엔타, 小雁塔)

 

 


서안성 남쪽의 천복사(薦福寺)에 위치해 있다. 천복사는 당대 장안성 내에서 유명한 불교사원이었다. 684년에 지어졌으며, 중국 황실이 고종이 죽은 후에 “헌복(獻福)”을 위해 지어 준 사찰이다. 그래서 원래 이름도 헌복사(獻福寺)였는데, 무측천 때(690년) 천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대사가 인도에 가서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에 이곳에서 경전을 번역하여 대량의 불경을 남겼다. 소안탑은 당 중종(707-709년) 때 지어졌는데, 원래는 15층 높이였으나 1556년 섬서 대지진 때 훼손되어 현재 높이는 13층(43.3m)이다. 대자은사 내에 위치한 대안탑과 대치하고 있고, 크기 면에서 약간 작다는 이유로 소안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13층의 소안탑은 사각형의 평면에 1층의 높이가 가장 길며 점차 올라갈수록 층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폭도 좁아져 부드러운 곡선을 지니고 있다. 1층 북쪽과 남쪽에 권문(券門)이 있고, 2층부터는 각 층마다 권창(券窓)이 나있다.

 

 

 

 

시인들의 탑 대안탑(다엔타, 大雁塔)

 

 

 

대안탑은 서안시내에서 4km 떨어진 자은사(慈恩寺)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자은사는 648년 당대 황제 고종이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만든 절로 현재의 모습은 청대에 재건축한 것이다. 대안탑은 중국에서 유명한 불탑 중 하나로, 652년에 당(唐)나라 현장(玄奬)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7층의 누각식전탑으로 총 높이가 64m에 기반부 둘레는 25미터이다. 외부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탑 내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갈 수가 있다. 매 층의 사방에는 각기 하나의 아치형 문이 있어서 먼 곳까지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당대의 두보 등 많은 저명한 시인들이 대안탑에 올라와 본 후 많은 문구들을 남겼다. 탑 내부로 올라가는 데에는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또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대 중엽에는 진사에 급제하면 먼저 곡장(曲江), 행원(杏圓)에서 잔치를 한 후에 대안탑에 올라와서 탑 벽에 기념 친필을 남기는 것을 대단한 영예를 여겼다. 유명한 당대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역시 진사에 합격하고 난 후, “자은탑에 친필을 새긴 17명 중 가장 어린 사람이다.(慈恩塔下題名處, 十七人中最少年)”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종루(쫑로우, 鐘樓)

 

 

 

종루(鐘樓)는 서안중심에 위치한 동서남북 사방이 연결되어 있는 교통중심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비슷한 위치로 총 높이가 36미터, 총 면적이 1377.4 평방미터다. 서안의 종루는 중국에 남아있는 수많은 종루중에서 제일 크고 보존이 완벽하여 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일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종루는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 17년인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 3층, 내부 2층 정방형의 누각형태다.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지금의 서안시 광제가(廣濟街)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만력 1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인데, 사면에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서안시내를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누각 안에 보전되어 있는 종은 고대시대 때 아침을 깨우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서, 새벽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열고 저녁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종루가 서안 중심에 위치해 있고, 종루를 기준으로 교통이 4방으로 통하기 때문에 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먹거리 장터가 열려 있다. 종루가 있는 곳은 8차선의 넓은 도로로, 종루에서 서안성벽까지 양쪽의 도로변에 새로 지어진 건물과 백화점, 은행,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고 성벽 왼편으로 고가(古街)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북경의 유리창 거리처럼 그림, 옥, 도장, 장식품 등 고물건을 판매하는 상점거리인데 거리 끝에는 비림(碑林)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취화산(췌이화산, 翠华山)

 

 

 

서안시에서 남쪽으로 약 23킬로미터 떨어진 진령산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취화산은 해발이 약 1500미터에 달하며 태을산(太乙山)이라고도 불리운다. 중국 내에서 일찍이 “종남독수(終南獨秀: 취화산의 주봉인 종남의 수려함은 비길 곳이 없다는 뜻)”와 “중국지질지모박물관(中國地質地貌博物館)”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취화산의 관광지는 벽산호(碧山湖)와 천지(天池), 산붕(山崩)경관구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2001년 3월 국토자원부에서 최초로 지정한 11개 국가 지질공원 중 하나이며, 지질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미와 빼어난 경관도 매력적인 곳이다. 주봉(主峰)인 종남은 해발 2604미터에 달한다.

 

 

 

 

대당부용원(따탕푸롱위엔, 大唐芙蓉园)

 

 

 

 

 

 

 

 

 

 

 

일반적으로 부용원(芙蓉园)이라 줄여부른다. 원래 오랜 세월동안 명성을 떨친 황가의 어원으로서 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서안(西安)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안탑(大雁塔) 에서 가깝다. 수(隋)나라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에 이르는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고풍스럽고, 깊이 있는 매력과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도 일품이다.

 

오늘날의 부용원은 당나라 부용원 유적 위에 지어진 것으로 중국 최초로 당(唐)나라의 문화와 당대 시대상 및 생활상을 전방위적으로 속속들이 재현해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조선시대를 재현한 민속촌과 같은 위상을 지닌 곳이다. 볼거리도 많거니와 단순히 오락으로 즐기고 넘기는 눈요기 거리가 아니라 역사를 배우고, 현재와 미래를 사색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즐거운 학습장으로 매우 유익한 관광지라 할 수 있다. 부용원 안에는 자운루(紫雲樓), 사녀관(仕女館), 어연궁(御宴宮), 방림원(芳林園), 황명구천극장(凰鳴九天劇場), 행원(杏園), 육익차두(陸翼茶杜), 당시(唐市), 곡강류음(曲江流飮) 등의 관람관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다채로운 구성으로 “오감”(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체험을 할 수 있어 중국 서북 지역에서 단연 손꼽히는 테마공원이다.

 

특히 매력적인 야경으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밤 어스름이 찾아올 때면 부용원 중앙에 위치한 호수에서 분수처럼 물이 뿜어져 올라오고, 그 위로 레이저가 쏘아지며, 수면 위에는 세계 최대규모의 수막(水幕)영화가 펼쳐진다. 화려하고 몽환적인 야경은 관광객들에게 국제도시로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당나라시대로 돌아간 듯한 환상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병마용(빙마용, 兵马俑)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秦始皇)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 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 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1호갱은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약 230m, 남북으로 약 62m로 총 면적이 12㎢ 정도이다.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양귀비의 연못 화청지(화칭츠, 華清池)

 

 

 

 

 

역사적 미인 양귀비(楊貴妃)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서주(西周)시기, 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려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 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화청지 동쪽구역에는 정말약(郭沫若)이 쓴 “화청지” 금자편액이 걸려있으며, 구역 내에는 하화각, 비하각, 오간정(1936년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머물던 곳) 등의 건축물이 있다. 그 중 온천석벽에 있는 “온천송비(溫泉頌碑)”는 중국 비석예술 중에서도 우수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구역에는 당 화청궁 어탕유적박물관이 있으며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의 당(唐)나라 때 현종(玄宗)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탕과 문물 진열실이 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또한 매일 육각정 무대 앞에서는 당나라 전통 공연이 열린다.

 

 

자료 : 중국국가여유국 홈페이지(www.visitchina.or.kr)